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Regno d'It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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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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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당시의 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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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 1946년'''
'''표어'''
F.E.R.T.(라틴어)[2]
'''국가'''
왕의 행진곡(1861년~1943년, 1944년~1946년)
피아베 강의 전설(1943년~1944년)
Giovinezza(사실상)(1922년~1943년)
'''위치'''
남유럽
'''수도'''
토리노(1861년~1865년)
피렌체(1865년~1871년)
로마(1871년~1946년)
'''인구'''
1870년 27,900,000명
1910년 37,200,000명
1939년 56,532,624명[3]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국가원수'''

'''정부수반'''
총리
'''주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주요 총리'''
카밀로 카보우르
프란체스코 크리스피
베니토 무솔리니
'''민족'''
이탈리아인[4]
'''크기'''
식민지 포함: 3,798,000km²
본토 면적: 310,190km²
'''통화'''
리라(₤)
'''성립 이전'''
사르데냐 왕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 공화국[5]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
1. 개요
2. 역사
2.1. 건국에서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2.2. 파시즘의 대두
2.3. 팽창 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 참전
2.4. 항복과 왕정 폐지
3. 역대 국왕
6. 평가
7. 대중매체에서의 이탈리아 왕국
8. 기타
8.1. 표어 F.E.R.T.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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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반도사르데냐, 시칠리아에 존재했던 왕국이다. 고대 로마 이후[6] '''이탈리아 반도를 처음으로 통일한 국가다.'''
'이탈리아 왕국'이라는 이름 하에 통일된 엄연한 제국주의 열강이었지만 근대 내내 열강치고는 안습한 가도를 달렸다고 보기도 하는 불운의 국가였다. 최대 영역은 이탈리아 본토에서부터 리비아와 동아프리카 일부, 발칸 반도까지였다.

2. 역사



2.1. 건국에서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이전부터 있어왔던 통일 전쟁은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진 이후에도 계속되어 1870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유 중인 트렌티노알토아디제오스트리아 연해 지대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이탈리아 전 지역이 이탈리아 왕국 아래 하나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사르데냐 왕국국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국왕이 되었다. 1870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인구는 27,900,000명으로 열강 중에서 봐도 상당히 많다고 할 수 있는 국가였다.
그러나 통일 후유증이 너무 커[7] 많은 이들이 실직 상태가 되고 그로 인해 국내의 혼란이 가중되는 등 여러 모로 어지럽기도 했다. 그런 국내의 불만을 돌리기 위한 이유 등으로 이탈리아 왕국은 식민지 팽창에 주목을 해 이탈리아 왕국군을 동원해서 리비아소말리아 일부 지역을 먹어 치워 버리고 무솔리니 집권 후에는 알바니아와 1896년 패배의 굴욕을 당한 적 있던 에티오피아를 잠시 강점한다.[8] 중국에는 1901년부터 조차지 형태의 이탈리아령 톈진이라는 식민지가 존재했으나, 1943년 일본에 의해 왕징웨이 정권에 반환됨으로써 사실상 소멸했고, 1947년 신생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에 의해 중국 국민정부에 공식적으로 반환된다. 다른 열강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라 해도 1이탈리아 왕국의 인구는 1910년에 37,200,000명에 달했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였다.
이렇게 다른 열강들 틈바구니 속에 자기 영역을 넓혀 보겠다고 애쓰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져 버린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삼국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범 게르만주의를 내세우고 있었던 삼국 동맹과는 상당히 사이가 멀어진 것도 있었고, 사실 오스트리아와는 뿌리깊은 적대 관계로 영토 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게다가 삼국 동맹오토 폰 비스마르크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방어 동맹'''이라는 목적[9]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10]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선제 공격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삼국 동맹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협상국 측의 영토 약속을 받아 내고 협상국에 참전했다.

2.2. 파시즘의 대두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보상으로 받는다는 약속이 온전히 지켜지지 않았으며, 전후 회의에서 다른 참전국들에 비해 돌아온 몫도 적어서 기껏해야 배상금 일부와 티롤 지방 정도를 얻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는 국가 파시스트당의 전신인 전투 파스키를 조직한 뒤 서서히 지방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집권적인 체제 형성을 추진하는 등 자신의 세력을 구축한 뒤 결국에는 왕실의 묵인 하에서 로마 진군이라는 사실상의 쿠데타로 정권을 휘어 잡게 되어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수립했다. 무솔리니는 정권을 잡은 뒤 파시즘 대평의회라는 국가 최고의 의사 결정 기관을 만들었고, 야권 세력과 불만 세력을 탄압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 정권 설립 전과 집권 중에도 계속 지속적으로 정권의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계열 반독재, 반파시스트 좌익 혁명 세력의 영향력도 막강했다 보니 프랑코 정권처럼 자국민에 대한 백색테러도 숱하게 저질렀다.

2.3. 팽창 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국민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팽창 정책으로 스파치오 비탈레를 주장한 뒤 로마 제국 부활을 외치며 에티오피아알바니아를 침공했다. 알바니아는 3달도 채 저항하지 못하고 강점되지만, 에티오피아는 전면전으로 7달 동안 맞서 싸우다가[11] 결국 침공 이듬해인 5월에 수도 아디스아바바가 함락됐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주요 지역을 장악했어도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해서 강점 기간 내내 에티오피아 고원 일부 지역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지지하는 저항세력 통제 하에 남아있었다. 침공의 구체적인 양상이 어떻든 간에 무솔리니 정권은 에티오피아 침공과 강점을 승인하지 않는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 황제와 이탈리아 왕을 겸임한다.
1933년부터 무솔리니 정권은 나치 독일 히틀러 정권과 우호관계를 진전시키기 시작했다. 더욱이 에티오피아 침공과 알바니아 침공으로 미국·소련·프랑스·영국 등 다른 열강과 긴장이 높아지면서[12], 파시즘 정권 하 이탈리아와 나치즘 정권 하 독일 사이는 빠르게 가까워진다. 스페인 내전에는 함께 프란시스코 프랑코 진영에 자금·군장비·의용군을 파견하기도 했다. 비록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두 나라 간 긴장이 급속도로 높아졌지만 곧 진정되었고 이탈리아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승인했다. 결국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게 궁지에 몰리자 이탈리아는 독일 편에 서서 프랑스에 선전포고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하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 군대는 독일에게 털린 프랑스 남동부 지역을 침공하는 데도 고전을 면치 못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연패하여 참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독일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에티오피아리비아 전역이 연합군에게 털려버리고 그 후 1943년 추축국 중에서는 거의 이라크 왕국 다음으로 항복해 버렸다.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존속하지만, 이탈리아에 연합군의 군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무솔리니를 비롯한 파시스트당 잔당들은 나치가 북이탈리아에 살로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들고 거기서 연명하다가 결국 베를린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멸망하면서 살로 공화국 지역은 자연스레 이탈리아 왕국 땅으로 돌아왔다.
나치 독일 초기에는 독일과 껄끄러운 관계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을 때는 '''전쟁'''까지도 고려하였고 강철 조약 이후에도 당시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전통적인 우방 프랑스를 버리고 독일을 택한 데에 대한 우려를 표방했을 정도다. 특히 인종관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큰 차이를 보였는데 히틀러는 광적으로 인종적 순혈주의에 집착했는 데 반해 무솔리니가 추구한 제국주의와 급진적 민족주의는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배격하며, 히틀러의 인종정책에 비판을 가했다. 이 시기 이탈리아는 옛 베네치아 공화국슬라브, 그리스계 영토들도 많이 흡수했고, 이탈리아는 독일보다 인종적, 문화적인 면에서 다양성이 깊었기 때문에 나치식 생물학적 인종주의에 대한 집착은 결코 대중화 되기 힘든 토양이었다.
그러나 파시스트 이탈리아라고 해서 인종, 민족주의적 차별과 박해를 가하지 않은 건 아니다. 베네치아와의 역사적 접점을 통해 주로 현지 크로아티아 남슬라브계 민족주의자들과 소유권을 두고 경쟁했던 달마티아 해안 지방에서는 나치 못지 않은 독한 학살과 인종청소를 저지르며, 류블랴나 일대에서만 현지 인구의 7%~10% 정도의 사람들을 직영 혹은 동맹 나치스의 수용소로 보냈다. 그리스에서도 도메니콘 학살을 비롯한 반빨치산 '평정' 을 명분으로 대량 학살을 종종 저질렀으며, 아예 유색인종이었던 식민지 리비아와 침공 이후 연합군이 해방하기 전까지 점령했던 에티오피아에서는 훨씬 더 많은 수의 학살과 인종 청소를 저질렀다. 동맹국 독일과 연줄이 있는 쥐트티롤 지방에서도 반파시스트 숙청과 문화, 언어적 탄압을 저지르며 강제적인 이탈리아 동화 정책을 폈다.[13]

2.4. 항복과 왕정 폐지


그러나 이탈리아는 독일이나 일본보다 일찍 항복하고 1943년부터 연합군으로 돌아섰기 때문에[14] 패전국 취급을 받지 않아서 전범재판이 열리지 않았고, 식민지였던 리비아에서 식민지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에티오피아에서 기독교인 3만명을 자기 목숨 노렸다고 보복으로 쳐 죽이고 사람들 수천명을 강제 수용소로 보냈던[15] 로돌포 그라치아니 같은 전범들은 혐의와 범죄가 명백한데도 감형으로 풀려나 종전 이후에도 목숨을 보전했고[16] 문화적으로 널리 퍼진 '''유쾌한 이탈리아 이미지'''를 덮어 씌워 어영부영 넘어갔단 말도 있다. 잃은 영토도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편이다.
이후 국민들의 신뢰를 잃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퇴위까지 강행하면서 군주정을 사수하려고 했지만, 이미 왕가는 민심을 잃은 상황인지라 군주정은 1946년 국민투표로 인해 폐지되고[17] 결국 이탈리아 왕국은 공화국으로 바뀌게 되었다.투표결과 사보이아 왕가는 추방되었고 단초를 제공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집트에서, 마지막 국왕 움베르토 2세스위스에서 객사했다. 2002년에 들어서야 왕족들의 이탈리아 입국이 허용되었다. 공화국이 된 1950년에 이탈리아의 인구는 47,100,000명으로 증가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공화국이 유지되었다.

3. 역대 국왕


대수
이름
재위기간
1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1861년~1878년
2
움베르토 1세
1878년~1900년
3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1900년~1946년
4
움베르토 2세
1946년

4. 이탈리아 제국





5. 군사




6. 평가


로마 제국 이후로 이탈리아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통일 왕조였다는 의의와 독가스 금지 조약에 서명해놓고도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에서 독가스 공격을 가해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고 강압적인 식민지배를 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추축국의 일원으로 온갖 전쟁범죄 행위를 행했다는 비판이 겹치는 꽤나 평가가 엇갈리는 국가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탈리아 왕국 역시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엄연한 그 당시 강대국이었다는 것이다.

7. 대중매체에서의 이탈리아 왕국


  • 벽람항로에서 이탈리아 왕국을 모티브로 한 사르데냐 엠파이어(사디아 제국)가 등장한다.

8. 기타


수도는 왕국 수립부터 1865년까지는 토리노, 1865년에서 1871년까지는 피렌체였으며. 1871년부터 왕국 멸망 시까지는 로마였다.
유럽아시아 지역에서 각각 활동했던 나치 독일일본 제국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제국주의 열강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국가 중에서는 존재감이 없다. 그나마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짙은 영향력과 악취를 남겼던 지방은 발칸반도, 북아프리카, 에티오피아 같은 남유럽과 아프리카의 몇 군데일 뿐인데, 이들 모두 여러 모로 세계 근현대사의 중심이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8.1. 표어 F.E.R.T.


F.E.R.T.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때 채택된 사보이 왕가이탈리아 왕국의 표어이다.
F.E.R.T.가 무엇의 약자인지 확실히 정해진 것은 없고, 다만 몇몇 라틴어 구절의 약자일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 Foedere et Religione Tenemur (We are bound by treaty and by religion)
우리는 조약과 종교 안에 존재한다.
  • Fortitudo Eius Rhodum Tenuit (His strength conquered Rhodes)
그의 강함(또는 용기)이 로도스를 정복했다.
  • Fortitudo Eius Rempublicam Tenet (His bravery preserves the state)
그의 강함이 우리 주(州)를 보전한다.
  • Fides Est Regni Tutela (Faith is the protector of Kingdom)
믿음이 우리 왕국의 수호자이다.

9. 관련 문서


[1] [image]
정부기에는 문장 위에 왕관을 넣었다.
[2] 아래의 표어 F.E.R.T. 항목 참고[3] 당시 9등[4] 독일인, 프랑스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알바니아인, 그리스인, 유대인 등의 소수민족들도 있긴 했지만 사실상 이탈리아인의 단일민족국가에 가까웠다.[5]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살로 공화국)은 애초에 무솔리니가 나치 독일의 도움으로 세운,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미승인국이다. 미승인국이라도 기존의 국가가 망한 뒤 세워진 것이면 모를까 살로 공화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리고 '''살로 공화국이 망한 후 1년 뒤까지도''' 이탈리아 왕국은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 왕국이 망하고 합법적으로 들어선 이탈리아 공화국을 진정한 후계 국가로 봐야 한다.[6] 동고트 왕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를 일시적으로 통치했던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의 연속체일 뿐더러 동고트 왕국 자체가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영토로 했고 이탈리아 분열은 유스티니아누스 이후 시작되었기에 제외된다.[7] 중세부터 근대까지 내내 수많은 국가가 병립해 있었고, 그 발전 양상도 다르며, 통일 주체도 따지고 보면 외지인이었다. 이탈리아 통일 전쟁 당시에는 이탈리아화되었지만, 굳이 따진다면 사르데냐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으로 출발하여 프랑스의 지배 하에 들었던 나라였다.[8] 에티오피아의 경우 19세기 말에도 침략한 적이 있었지만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아도와 전투에서 패배하여 실패한 바 있었다. 무솔리니 정권 시기 1936년에 와서야 겨우 강점했으나, 그나마도 1941년경 영국군 주도 연합군에 의해 축출당해 강점 기간이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강점도 완벽하지 못해서 강점 기간 내내 에티오피아 고원 일부 지역은 하일레 셀라시에 1세를 지지하는 저항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전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옛 식민지로써가 아니라''' 이탈리아에 대한 '''승전국'''으로써 이탈리아로부터 배상금을 받게 된다.[9]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반감을 품고 복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만든 동맹이 삼제동맹이었다. 프랑스가 만일 러시아 제국과 손을 잡게 된다면 독일은 앞뒤로 위험한 상황이 되기 때문에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오스트리아 제국발칸 반도를 서로의 앞마당이라 생각하여 힘을 과시하면서 위태위태한 상황을 지속시키자 그에 대한 대안으로 삼국 동맹을 체결하게 된다.[10] 사실 이탈리아의 자의적인 해석이기는 했다. 조약에서는 방위 조약인지 공격 조약인지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11] 참고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내에서도 군사강국이였다 . 이미 이전에 이탈리아군을 괴멸시킨 사례도 있고.[12] 이들 4개 국가가 침공을 실제로 방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침공 결과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특히 미국과 소련은 이탈리아가 두 나라를 강점하고 있는 기간 내내 이들 나라에 대한 강점 자체를 승인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도 이탈리아 왕의 에티오피아 황제위와 알바니아 왕위를 승인하지 않고 강점 자체만 38년 인정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면서 이 승인마저도 취소한다. 연합국 진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 이탈리아 정부와 체결한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알바니아 강점의 합법성을 부인함을 분명히 했고 이탈리아 정부가 에티오피아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했다.[13]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이탈리아가 인정하는 조건으로 쥐트티롤 지방에 대한 탄압을 묵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14] 무솔리니도 '''이탈리아''' 측이 끌어내려 체포했으니... 다만 이후 무솔리니는 나치독일에 의해 탈주한다.[15] 1937년 2월 19일의 암살 시도와 그 이후의 대량 보복 학살 사건이었다.[16] 그라치아니는 이탈리아가 제2차 대전 종전 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개헌한 이후인 1955년에 병사 전까지 정신 못 차리고 네오 파시즘 운동의 지도자 노릇을 했다.[17] 국민투표 자체는 연합국부정선거 조작이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미 왕정이 국민의 신뢰를 잃은지라...